주권이라는 질문에 갈라진 두 답: 누가 만들느냐, 누가 통제하느냐
글의 핵심 개념을 형상화했습니다.
두 헤드라인, 나란히
같은 날 나온 기사 두 건을 나란히 놓으면 서로 다른 답이 부딪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서울경제의 ‘공공 AI칩 99.98%가 엔비디아’. 다른 하나는 뉴스1의 팰런티어 발언, ‘국산 AI 모델만으론 주권을 확보할 수 없다, 통제권이 핵심이다’. 전자는 누가 만드느냐의 문제이고 후자는 누가 통제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주권’이라는 같은 질문에 같은 날 나온 두 가지 답입니다.
소버린 AI는 본래 글로벌 LLM에 대한 의존이 서비스 중단, 정책 변경, 가격 인상, 수출통제 같은 리스크로 직결된다는 인식에서 부상한 개념입니다. 데이터, 모델, 인프라, 인력 전 과정에서 조직이나 국가가 통제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개념이 오늘 한국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칩과 모델의 국적을 묻고, 다른 하나는 결정권과 감사를 묻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이 차이가 오늘 뉴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신호라고 봅니다.
국산화의 답: 99.98%라는 숫자를 읽다
숫자부터 보겠습니다. 2024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산업통상자원부 소관 42개 기관이 AI가속기 191장을 사들였습니다. 금액은 102억 8760만 원. 그중 엔비디아가 190장, 금액의 99.98%를 차지합니다. 국산은 퓨리오사AI의 NPU 한 장, 250만 원뿐. 기관별 최대 구매처는 39억 6400만 원의 한국수력원자력이고, 한국가스공사, 강원랜드, 한국전력공사, 한국광해광업공단 순이었습니다.
이 숫자는 ‘구매 책임 부담’의 기록입니다. 외산이 고장 나면 책임지기 어려워, 공공기관은 늘 가장 안전한 브랜드를 골라왔습니다. 추론 용도 구매가 전체 금액의 47.2%를 차지합니다. 공공 예산의 절반 가까이가 이미 에이전트와 챗봇이 도는 추론 용도로 쓰이는데, 그 용도에서도 국산 NPU는 한 장뿐입니다. 국산 칩이 강점을 주장하는 영역에서도 상황이 이렇습니다.
산업부의 답은 조달입니다. 김정관 장관은 22일 국감에서 산하 공공기관과의 국산 반도체 업무협약을 11월 중 체결한다고 했습니다. 구매 책임 부담을 덜어 공공이 국산 칩의 ‘첫 구매자’가 되게 하자는 것. 국산 NPU에 대한 수요는 이미 생겼습니다. 딥엑스가 국방부 영상감시 시범 구축으로 국산 NPU를 공급해 10여 개국에서 약 183억 원 규모의 주문을 확보했다는 보도가 그 증거입니다. 이 흐름은 이번 달만의 일이 아닙니다. 과기정통부는 우수연구개발 혁신제품 지정을 통해 공공기관 수의계약, 기본 3년과 연장 시 최대 6년을 허용하고 구매면책까지 열어줬습니다. 조달 소요 기간도 60일에서 10일 이하로 줄였습니다. 수요를 만드는 쪽과 공급을 밀어주는 쪽이 맞물리는 구조입니다. 국산 NPU가 앞으로 들어갈 용처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CCTV와 경계감시, 챗봇, 문서처리, 개인정보 마스킹, 사이버보안 관제. 공공이 ‘선택할 책임’을 지느냐의 문제인 셈입니다. 국산화의 답은 결국 수요를 만들어내는 쪽의 논리입니다.
통제의 답: 한남동에서 나온 이틀의 발언
다른 답은 팝업스토어에서 이틀에 걸쳐 나왔습니다. 팰런티어가 10월 22일과 23일, 서울 한남동에서 두 번째 팝업스토어를 열었습니다. 지난해 성수동 첫 행사에 5000여 명이 다녀갔고 올해 핵심 주제는 ‘소버린 AI’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 3위 팰런티어 구매국이기도 하고 머니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팰런티어는 한국을 미국 외 민간 부문 최상위 시장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이 주제로 행사를 열고 이런 발언을 내놓은 것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핵심 발언은 채드 월퀴스트 AI 아키텍처 총괄에게서 나왔습니다. “소버린 AI는 국산 LLM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데이터, 컴퓨팅 자원, 모델 실행 환경, 업무 프로세스 전 계층에서 결정권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데이터가 어디로 가고 누가 결정하며 실행을 누가 감사하는지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악샤이 크리슈나스와미 수석 아키텍트는 “물리적 제조와 산업 현장 작업은 아직 AI가 뒷받침하지 못하는 분야”라며, 한국 기업의 제조 지식을 특화 모델 개발과 파인튜닝에 쓰는 기회가 지금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개방형 아키텍처로 미국과 중국 모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습니다.
현장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FDE는 엔지니어를 고객 현장에 두고 업무 시스템과 AI를 직접 잇는 방식입니다. 팰런티어가 파는 것이 모델이 아니라 ‘심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전날 HD현대 부산 사업장에서는 FDE가 선박 내부에 자체 AI 모델을 적용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간 고객사에서 신규 채용 지원 요청이 오히려 늘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10배의 일을 하는 시너지가 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한국만의 AGI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쓸 수 있는 AI를 조선, 반도체, 제조업 현장에 배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쪽으로 메시지가 수렴했습니다. 매일경제는 이번 방한의 메시지를 한 줄로 압축했습니다. “한국 AI 승부처는 조선·반도체, 현장에 AI를 심어야 한다”는 것.
왜 두 답은 같은 질문이 아닌지
겉으로 보면 두 쪽이 서로를 부인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국산화의 답은 ‘누가 만들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칩이 국산이어야 하고 모델이 국산이어야 하며 공급망이 국산이어야 한다는 것. 이번 주 국내 움직임도 이 축 위에 있습니다. SKT는 서울대, KAIST, 고등과학원 연구진과 교류회를 열고 확률론과 그래프 이론, 위상수학 전문지식을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A.X K2 학습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A.X K2는 이전 모델 대비 벤치마크 평균 성능을 32.2%p 끌어올렸으며 조 단위 매개변수 규모의 후속 모델도 준비 중입니다. 제조, 반도체, 국방 등 ‘일하는 AI’ 소버린 AI 생태계를 명시적으로 겨냥합니다. 삼보컴퓨터의 노선은 더 폐쇄적입니다. 인터넷이 필요 없는 AI PC ‘TG AI 스테이션’에서 생성형 AI를 돌리고, 한국어 LLM으로 질의응답과 문서 요약, 보고서 작성을 로컬에서 처리하는 구조입니다. 2026년 9월 과기정통부의 ‘인공지능제품·서비스 확인서’를 받았고, 정보보안이 중요한 공공과 교육, 연구기관을 겨냥한 제품입니다.
통제의 답은 ‘누가 결정하고 누가 감사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칩과 모델이 모두 국산이어도, 데이터가 해외로 나가고 실행 과정이 드러나지 않으며 누가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답하지 못하면 주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외산 모델의 실행을 자신의 경계 안에 두어 감사의 흔적을 온전히 남기면 주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월퀴스트가 ‘전 계층의 결정권’을 말한 이유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에이전트가 퍼질수록 무거워집니다. 모델이 말만 하는 시기는 지났기 때문입니다. 디지털투데이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 내 AI 에이전트를 ‘에이전틱 내부자’로 규정하고 ‘가디언 에이전트’로 24시간 감시와 통제를 제시했습니다. ‘모니터링’과 ‘통제’는 보안의 필수 인프라가 됩니다. 주권 역시 자연스럽게 ‘실행의 통제’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삼성SDS와 오케스트로가 인프라, 플랫폼형 소버린 AI를 내세우고 있고, 그 시장에 팰런티어의 FDE 방식이 들어왔습니다. 경쟁이 붙으면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은 ‘증명’의 문제가 됩니다. 실행의 흔적으로 주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전망: 승부처는 실행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전망을 짚어 보겠습니다. 앞으로 12개월에서 24개월, 주권 담론은 ‘모델의 국적’에서 ‘실행의 경계’로 쏠릴 것입니다. 글로벌 거인들이 컴퓨팅을 확장하는 사이, 그것을 쓰는 국가는 ‘어디서 돌리느냐’와 ‘어떻게 감사하느냐’를 놓고 경쟁합니다.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오픈AI는 1.25조달러 기업가치에 최대 300억달러 신규 유치를 마무리 단계에 두고 있고, UAE 투자자와 벤처캐피털 코튜가 주도합니다. UAE로부터의 추가 컴퓨팅 용량 확보를 위한 계약도 병행 협상 중이죠. 오픈AI가 공개한 목표는 2030년까지 총 6천억 달러 규모의 컴퓨팅 지출입니다. 투자 규모는 이미 알려진 대로입니다. 자본은 ‘만드는 쪽’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서 자산의 형태가 바뀌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글로벌이코노믹에 따르면 LSEG는 약 4.9조 원을 들여 옥터스를 인수했습니다. AI 시대의 데이터와 보안을 묶은 경쟁 우위를 사고파는 거래가 나왔다는 뜻입니다. 공공 우선구매 협약은 수요를 만드는 첫 시도이고, 통제권론은 그다음 단계를 위한 방향 제시입니다.
기업에겐 조달 체크리스트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델은 국산입니다’라는 말만으론 더 이상 주권의 답이 되지 못합니다. 데이터가 어디에 머물고 누가 뭘 실행할 수 있으며 자율도가 어느 단계이고 에이전트가 움직인 뒤에 어떤 감사 흔적이 남는지. 이 네 가지 질문이 곧 새로운 표준입니다. 칩과 모델은 질문을 실행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네 질문은 머지않아 공공 조달 규격서와 금융사의 공급망 점검문에 적힐 것입니다. 주권을 검증하는 기준이 감사 로그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통제가 제품이 된 곳
여기서 ThakiCloud의 관점을 덧붙이겠습니다. 팰런티어가 한남동에서 꺼낸 ‘통제’는, 사실 ThakiCloud가 이미 제품으로 답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같습니다. Paxis, Agent-Native Cloud의 핵심은 에이전트가 어디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를 통제하는 데 있죠. Skills와 Tools, Policies, Audit Logs는 Paxis에서 일급 리소스입니다. 자율도 거버넌스가 L0에서 L3까지 수준을 구분하고 모든 실행 앞에 정책 게이트와 감사 로그가 서 있으며 실행 자체는 격리된 샌드박스 안에서 일어납니다. MCP 커넥터와 스킬 마켓으로 국산이든 외산이든 모델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CostRouter로 작업마다 최적의 모델을 고를 수 있죠. 데이터가 해외로 나갈 수 없는 금융과 공공, 국방에서 폐쇄망 안의 실행 경계와 작업별 모델 선택은 진입 조건입니다. 월퀴스트가 말한 ‘전 계층의 결정권’은 Paxis에겐 정책 구호가 아니라, 소버린과 온프렘 Kubernetes 환경 위에서 정식 제품(v1.1 GA)으로 이미 만들어진 스펙시트가 아닐까요.
두 갈래로 갈라진 주권 질문, ‘누가 만들느냐’의 답은 이제 칩과 모델이 담당하고 있고 ‘누가 통제하느냐’의 답은 플랫폼이 담당할 차례입니다. 한남동의 이틀 발언과 서울의 99.98% 숫자는 같은 변화의 신호입니다. 주권을 사는 시대가 지나고 주권을 실행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아래 뉴스를 종합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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