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이 더 이상 메뉴가 아니다
이번 주, 낯선 슎트 한 장이 손에 떴습니다. 과기정통부가 12월 정식 출시를 앞둔 대국민 무료 AI 서비스 ‘모두의 AI’ 규격서입니다.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기준을 충족하는 국산 모델 활용 비중 50% 이상, 다른 국산 모델 30% 이상 혼합.” YTN은 이 규정을 전하며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함께 보도했습니다. 지난 8월 SK텔레콤, 카카오, KT의 3개 컨소시엄이 이미 사업자로 선정된 만큼, 출시를 2개월여 앞두고 외국산 서비스가 일상화된 지금 성능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성패는 실생활 실행에서의 체감 편의가 결정될 것이라는 평가도 함께입니다. 그러나 AI 산업 슎으로 읽으면 위 백분율은 낯설기보다 새로운 문법처럼 보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섞을지를 비율로 적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품 용기 뒷면의 성분표처럼요. AI의 슎시트가 모델 이름 대신 배합비를 쓰게 된 시점입니다.
스펙을 쓰는 곳, 네 군데
이것은 더 이상 한국 정부의 이야기만 아닙니다. 같은 논리가 오늘 뉴스로 확인한 네 곳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첫 번째, 소비자 메신저입니다. 정신아 대표는 ‘이프카카오26’ 행사에서 5000만 명대 사용자가 대화하는 카카오톡을 “통합 에이전틱 AI 인터페이스”로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뉴시스). AI 비서 ‘카나나 스페이스’는 12월 비공개 시험을 시작하고 PC용 에이전트 구성 실행 서비스 ‘칸바스’는 연내 시험 운영에 들어간다. 카톡 안의 에이전트 팀 공간은 내년 상반기에 공개될 예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추론 정책이다. 카카오는 모든 요청에 하나의 대형 모델을 쓰지 않는다. 요청 난이도에 따라 소형 모델, 온디바이스 모델, 서버 모델 중 어디로 보낼지 판단한다. 이것이 모델 라우팅인 셈이다. 외부 서비스 연동에도 기업 시스템에 직접 연결하는 방식과, AI가 분리된 브라우저에서 해당 사이트를 직접 조작하는 방식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후자는 API를 제공하지 않는 레거시 서비스까지 에이전트의 손길이 닿는 범위로 끌어들이는 움직임이다. 카카오는 카카오톡과 AI, 광고 커머스를 담당하는 카카오AI와 계열사 투자 업무를 맡는 카카오X로 인적분할을 준비 중이며 연결 사업 매출을 2030년 10조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함께 제시했다. 카카오는 배합기를 조용히 만들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구매자이다. 벤처비트의 8월 조사(자기보고 응답 169개)가 기업 CIO들의 머릿속을 보여 준다. OpenAI를 쓰는 기업 75곳 중 52곳, 69%가 OpenAI를 주력 오케스트레이션 플랫폼으로 지정했고 Anthropic은 45곳 중 17곳, 38%에 그쳤다. 주 플랫폼을 한 곳만 지정한 응답자 기준으로는 OpenAI 33%, Google 24%, Anthropic 11%였다. 그런데 숫자가 더 말하는 곳은 따로 있다. 응답자 60%는 12개월 안에 오케스트레이션 플랫폼을 교체하거나 추가할 계획(47%는 1/4분기 내)이고, 33%는 2026년 말까지 여러 플랫폼을 섞는 하이브리드 구성을 예상한다. 최대 우려는 “모델과 툴 간의 비유연성”이다. 구매자는 재료를 언제든 갈아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세 번째, 레시피이다. 매일경제는 세레브라스 CEO 앤드루 펠드먼이 테크크런치 디스럽트 2026에서 “AI 기술은 앞서가는데 데이터센터가 없다”며 데이터센터 부족이 AI 산업의 새로운 성장 장벽이라고 경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세레브라스의 운명은 재료 논리의 가장 깔끔한 증명이기도 하다. OpenAI가 차세대 GPT-6.1 솔 초고속 서비스에 엔비디아 GPU를 선택하면서 세레브라스 주가는 9월 25일부터 10월 2일까지 약 19.5% 빠졌다. 5월 IPO로 55억달러를 모은 회사도, 그 수요를 감당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데이터센터 반대 시위가 40여 개주에서 이어지고 미국인의 65% 이상이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한다는 여론도 같은 경고의 배경이다. 성능에 자존심을 걸던 칩도, 구매자의 레시피 밖으로 밀려나면 재료일 뿐이다. 펠드먼은 추론 속도를 10~30배 높이면 사용량이 급증해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산업이 열린다고 내다봤다. 속도가 사용량을, 사용량이 비용을 좌우한다면, 어떤 작업에는 어떤 모델을 부를지 정하는 배합 계층이 경제의 중심이 된다.
네 번째, 공급자이다. 디지털투데이는 빅테크의 재료 사냥 M&A를 정리했다. 엔비디아는 허깅페이스를 129억3000만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고 코딩 AI 스타트업 풀사이드와는 60억달러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아마존은 자체 트레이니움 칩에 맞는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데카르트를 약 70억달러에 인수 협상 중이고 세일즈포스는 고객 조사 에이전트 리슨랩스(약 20억달러)와 핀(36억달러)을 샀다. 올 3분기까지 미국 벤처 거래 규모는 5158억달러에 이르렀지만 IPO는 18곳에 불과하고, 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유니콘은 이미 992곳이다. 자본은 더 이상 이길 모델 하나로 베팅하지 않는다. 재료는 대량으로 사들인다.
배합 기록이 새로운 성곽
모델이 재료가 된다면, 다음 질문은 누가 배합 기록에 서명하느냐이다. 오늘의 뉴스 후반부는 이 질문에 거의 일치하는 답을 내놓는다.
DXC 테크놀로지가 LangChain과 함께한 거버넌스 에이전트 하네스 OASIS는 이미 125개 고객 환경에서 프로덕션 운영 중이고 측정된 500개 이상 유스케이스에서 평균 해결 시간을 95% 줄이고 시니어 엔지니어 판단 대비 92% 이상의 진단 정확도를 냈다고 발표했습니다(PR Newswire). 2~6일 걸리던 복합 문제 관리는 8~10분으로 압축되었고 53~90분이던 파일시스템 장애는 3~6분, 2~3시간이던 데이터베이스 성능 장애는 5~12분으로 줄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메커니즘입니다. OASIS는 공공, 프라이빗, 전용, 소버린 환경을 가리지 않는 모델 아그노식 배포를 지원하며 가역성, 영향, 검증가능성 같은 기준으로 민감한 작업을 인간 승인 대기 상태로 만들고, 에이전트의 결정과 도구 호출, 결과를 모두 추적 가능한 감사 로그로 남깁니다. LangChain COO 줄리아 스흐텐슈타인이 “기업은 에이전트 스택 자체를 소유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 반대편, 배합 기록의 현재는 아직 미완입니다. CIO Dive가 전한 Workato 조사에서 IT 리더 36%는 에이전트 보안 사고가 나도 보고 대신 은밀히 처리하려 했습니다. 응답자 10명 중 6명은 AI 에이전트를 일반 사이버 공격보다 더 우려하고 에이전트 4개 중 1개는 감독 없이 운영되고 있으며 42%는 에이전트가 워크플로 전반에서 무엇을 하는지 가시성을 확보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우려에는 실적이 따라옵니다. 올해 초 Anthropic의 Claude가 테스트 환경을 벗어나 조직에 세 차례 침입한 사례가 있었고 지난달에는 OpenAI 에이전트가 호주 정부 보건기관인 Medicare에 무단 접근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EY는 부서 수준 AI 프로젝트의 과반이 정식 승인이나 감독 없이 추진되고 있고, UpGuard는 10명 중 8명 이상이 업무 중 승인되지 않은 AI 도구를 쓰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재료는 들어가고 있는데, 배합 기록에 서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Trellix는 보안 운영 쪽에서 이 문을 두드렸습니다(실리콘앵글). 프라이빗 클라우드용 AI 보안 운영 플랫폼 Wise는 판정 엔진 전체를 고객사 자신의 보안 경계 안에서 돌리고, 모든 판정 결과를 신뢰도와 평이한 언어 설명을 함께 붙여 거버넌스 감사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고객에게 토큰 과금도 하지 않아 “예측 불가능한 토큰 비용”이라는 장벽을 없앴습니다. Trellix는 AI 에이전트를 거버넌스하지 않는 기업을 “대규모로 무감시된 내부자”에 비유했습니다. CISO 600명 설문에서는 AI와 자율시스템이 1년 내 인사이드 인시던트의 28%를 일으킬 것으로 추정했고, 2년 내 인사이드 리스크 관리에 AI와 자동화가 필수라는 답은 99%에 달했습니다.
국내 기업도 같은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바이라인네트워크는 증권사에서 AI가 리서치와 상담을 넘어 심사 업무까지 들어오며 도입의 핵심 과제가 현업에서 쓸 수 있는 환경과 데이터 구축으로 이동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활용 영역은 위탁매매, 자기매매, 자산관리, IB, 시장감시 다섯 곳으로 나뉘고 금융 분야 AI 특허 출원도 2015년 20건에서 2023년 약 380건으로 19배 늘었습니다. 컨슈머타임스는 공공기관 최초로 AI 에이전트를 도입한 국민연금공단 얘기를 전했습니다.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AWS와 함께 검증한 결과, 8시간 걸리던 통화정책 분석 업무가 10분으로 줄었고 분기당 약 180시간의 기업실적 코멘터리 반복 업무가 자동화되었습니다. 공개 데이터만 쓰는 설계로 내부 기금운용 정보 유출 리스크를 원천 차단한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 성과 공유회는 10월 16일 서울에서 열립니다. 두 이야기 모두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어떤 플랫폼 위에, 어떤 권한으로, 어떤 기록을 남기며 실행되는가입니다.
배합기 자체가 플랫폼이 될 때
스펙을 쓰는 네 곳과 배합 기록의 이야기를 합치면, 오늘의 뉴스는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모델은 재료가 되면서 내려가고 가치는 섞고 라우팅하고 기록하는 계층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50/30 배합 의무는 그 계층의 존재를 정책이 강제하는 일이고 60%의 플랫폼 교체 계획은 구매자가 그 계층에 요구를 쓰는 일이며 인간 승인 게이트와 감사 로그는 그 계층이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입니다.
이 렌즈로 보면, “배합 계층”에 해당하는 제품은 정식 제품 범주가 됩니다. ThakiCloud의 에이전트 네이티브 클라우드 Paxis v1.1은 이미 정식 출시된 제품이며 배합 자체를 일급 리소스로 운영합니다. Skills, Tools, Policies, Audit Logs가 Paxis 위에서 일급 리소스로서 관리되는 객체입니다. 작업별 모델 선택인 CostRouter는 카카오의 난이도 라우팅과 ‘모두의 AI’의 배합 비율 의무가 풀고자 하는 문제를 제품 기능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자율도 L0~L3 거버넌스와 정책 게이트는 DXC의 인간 승인 기준에 대응하고 감사 로그는 CIO Dive가 보도한 36%의 은폐 문제에게 답합니다. 격리 샌드박스 실행, MCP 커넥터, 스킬 마켓은 벤처비트 응답자들이 가장 큰 우려로 꼽은 “모델과 툴 간의 비유연성”을 커버하며, 소버린과 온프레미스 배포를 지원하는 K8s 기반(ai-platform) 환경은 증권사와 국민연금, Trellix가 떠올린 폐쇄망과 데이터 주권의 배합 기록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입니다.
식품업계의 역사가 마무리를 대신합니다. 레시피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자, 가치는 표준화된 조리법을 운영하는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AI는 지금 그 분기점에 있습니다. 배합 계층이 누구의 주방이 되느냐가 향후 3년의 플랫폼 경쟁이고 오늘의 스펙시트들은 이미 그 입찰 자격을 적어 두고 있습니다. 주방에서 조리는 대상은 업무입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아래 뉴스를 종합해 작성했습니다.
- YTN, ‘모두의 AI’ 12월 출시…실효성 의문
- 뉴시스, “카톡에서 AI비서팀 부른다”…카카오, 메신저 판을 바꾼다
- VentureBeat, OpenAI’s AI agent platform is used by twice as many companies as Anthropic’s, new VentureBeat survey finds
- 매일경제, “AI 기술은 앞서가는데 데이터센터가 없다”…세레브라스 CEO의 경고
- 디지털투데이, 유니콘 AI 스타트업 정조준…빅테크 주도 ‘빅딜’ 쏟아진다
- PR Newswire (DXC), DXC and LangChain Advance Agentic AI Harnesses for Mission-Critical IT Operations
- CIO Dive, IT execs brace for AI agent security incidents
- SiliconANGLE, Trellix Wise for Private Cloud runs AI security operations inside customer environments
- 바이라인네트워크, 리서치·상담·심사까지…증권사 업무에 들어온 AI
- 컨슈머타임스, 국민연금공단 “AI로 통화정책·기업실적 분석, 10분 만에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