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하나가 있습니다.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글을 올리고 로그인하고 예약을 잡으려면 이 칸에 체크를 해야 했습니다. 십여 년간 인간과 인터넷 사이에 가장 작고 가장 당연했던 계약이었습니다. 그런데 2023년부터 이 계약은 조용히 깨졌습니다. 체크하는 쪽에 인간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인터넷의 ‘양방향 인증’ 시대는, 인간이 ‘나는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AI가 ‘나는 AI입니다’라고 말하는 체제의 시작입니다. 이 글은 그 보도에서 출발해, 인터넷보다 한 층 더 깊은 곳에서 기업이 던지는 질문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가 약속이 아닌 날 개념을 형상화한 이미지 글의 핵심 개념을 형상화했습니다.

53 대 47, 다수가 바뀐 날

숫자부터 보겠습니다. 2023년 글로벌 인터넷 트래픽에서 AI 봇을 포함한 자동화 트래픽의 비중은 53%였습니다. 인간 트래픽은 47%. 인터넷 역사상 비인간이 숫자로 인간을 앞지른 첫 순간입니다. 과거 자동화 트래픽의 주류는 검색 키워드를 긁어 모으는 크롤러였습니다. 지금은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지능형 봇으로 중심이 이동했고, ‘인간인지 아닌지’ 가르는 고전적 테스트마저 통과하는 수준이 됐습니다. 전제가 무너지면 그 위에 지은 건 모두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기존 인증 체계가 무력화되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비밀번호, 문자 인증, 캡차(CAPTCHA)는 모두 ‘인간과 기계를 구분한다’는 전제로 만들어졌고, 기계 쪽이 지능해지면 그 장치는 의미를 잃습니다. 조선일보는 2023년을 기점으로 가짜 계정 대량 생성, 여론 조작, 딥페이크 사기 같은 위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이커머스, SNS, 공공 플랫폼은 가짜 리뷰와 봇 투표, 딥페이크 사기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산업계의 답은 뭘까. 의외로 정면이었습니다. 기계를 막아내겠다는 전략을 포기하고 양쪽이 각자의 정체를 밝히는 체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인터넷 보안의 핵심 질문이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당신은 인간인가, AI인가’로 이동했다는 진단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정체성 확인 기술은 이제 AI 시대의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는다고 전망하는 것입니다. 양방향 인증은 보안 패치가 아닙니다. 인터넷의 다수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전제로 체제를 다시 짜는 일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AI입니다’, 두 장의 출생증명서

인간 쪽에서 조용히 자라난 건 홍채 기반 신원 증명입니다. 샘 올트먼이 설립한 툴스 포 휴머니티는 2억 5천만 달러를 조달하며 월드 ID를 세웠고 홍채를 촬영해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으면서 ‘이건 인간이다’를 증명합니다. 이용자 수는 이미 1,800만 명을 넘었고, 틴더를 비롯한 플랫폼에 도입됐으며 타이완과 말레이시아 정부까지 국가 단위로 확산 중입니다. 이 증명서가 확인하는 것은 ‘어떤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다’인 그 사실 자체입니다.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종(種)만 확인하는 구조라 가능한 일입니다.

AI 쪽에서는 별개의 증명서가 발급되고 있습니다. 앤트로픽은 클로드가 생성한 텍스트에 사람의 인지 없이 통계적으로 판별 가능한 워터마크를 넣어 AI 생성 여부를 가려내는 기술 적용을 시작했습니다. 앤트로픽만은 아닙니다. 주요 AI 기업들이 자체 모델 생성물에 워터마크와 출처(프로브넌스) 라벨링을 의무화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워터마크가 확인하는 것도 ‘누가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만들었는지’입니다. 인간의 증명서가 종을 확인한다면, AI의 증명서는 출처를 확인합니다.

두 가지를 합치면 인터넷의 구조가 바뀝니다. 모든 참여자를 의심하고 막던 일방향 체계에서, 먼저 밝힌 뒤 상호작용하는 양방향 체계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시장의 반응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산업계 전망에서 글로벌 신원 인증 시장은 2024년 165억 달러에서 2033년 455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봇을 막기 위해 지었던 시장이, 봇을 식별하기 위해 다시 지어지는 셈입니다. 오늘 뉴스 한가운데의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AI 시대의 가장 강력한 방어는, ‘나는 AI입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행위입니다.

기업은 ‘인간 vs AI’가 아니라 ‘누가 보냈나’를 묻습니다.

기업 현장에서는 질문이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인터넷이 ‘무엇이냐’를 묻는다면, 기업은 ‘누의 것이냐’를 묻습니다. 한 회사를 대표해 인터넷에서 행동하는 에이전트를 대할 때, 외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인가 AI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직의 어떤 에이전트가, 어떤 권한으로, 무엇을 실행했으며 나중에 증명이 가능한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추상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 현실입니다.

오늘의 국내 뉴스가 증거를 줍니다. 미래에셋증권이 선언한 ‘미래에셋 3.0’은 정보 탐색에서 실제 운용까지를 AI로 잇는 시도입니다. 미국과 일본, 중국, 홍콩 4개국 상장사 1,500개 공시를 생성형 AI가 번역하고 요약하며 미국 기업 컨퍼런스콜에 대한 ‘AI 실적분석’ 속보도 제공합니다. 이달에는 ‘퇴직연금 로보 Wrap’이라는 IRP 상품도 나왔습니다. 로보어드바이저가 글로벌 자산배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고객 대신 실제 매매까지 수행하는 일임형 상품입니다. 누적 가입은 2025년 12월 10만좌, 5조 원에서 2026년 7월 말 14만좌, 8조 3,000억 원으로 7개월 만에 확대됐습니다. 지난해 GPU 기반 자체 AI 인프라를 지은 데 이어, 리서치센터 명칭을 ‘AI 리서치센터’로 바꾸고 RA를 애널리스트로 전환하는 조직 개편까지 단행했습니다. Tech & AI부문 산하 AI엔지니어링본부도 신설했고 1분기 코스닥 리서치 발간량은 전년 대비 79% 늘었습니다. 저성장과 연금 시장 확대 국면에서 보험사들까지 수수료 무료와 AI 확대 카드로 퇴직연금 점유율 싸움에 나서고 있어, 대형 금융그룹의 AI 자산관리 선점이 경쟁 구도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습니다. 에이전트가 실제 돈을 움직이는 순간, ‘이 지시를 누가, 어떤 정책 아래, 무엇이 검증하면서 내렸는가’는 보안 이론이 아니라 컴플라이언스 요건이 됩니다.

정부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7월 범부처 ‘에이전틱 AI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고 실행형 AI 생태계를 위해 안전, 실행, 수요의 3대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 가운데 ‘안전’은 오늘 이 글의 주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겹칩니다. 과기장관회의는 지난해 11월 첫 회의 이후 12차례 열렸고, 정책의 무게가 전략 수립에서 실증과 상용화, 성과 창출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정부는 AI 국가전략과 약 1만 장의 첨단 GPU 배분이라는 ‘판 짜기’ 단계를 거쳐, 이제 피지컬 AI, 에이전틱 AI, 자율주행 AI로 무게 중심을 더 구체적인 산업과 기술 단위로 낮추고 있습니다. 제11회 회의에서는 진해신항을 포함한 피지컬 AI 항만 전략과 에이전틱 AI 이니셔티브의 규제샌드박스 연계가 의결됐고, ‘모두의 AI’ 등 주요 프로젝트에 GPU 520장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배경훈 부총리는 “AI 경쟁의 진정한 성과는 우수한 기술 개발을 넘어 산업 현장과 국민 일상에서 활용되는 AI 구현”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이 흐름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K-미토스’ 경쟁입니다. 2025년 특화 파운데이션모델 사업에서 업스테이지, SKT, LG AI연구원 등 4개사가 선정된 이력이 있고 올해는 보안이라는 산업 영역에서 ‘특화 모델 + 현장 실증’ 경쟁으로 번졌습니다. 과기정통부의 보안 특화 AI 파운데이션모델(특파모) 공모에는 SKT와 업스테이지 컨소시엄(13개 기관), 네이버클라우드와 LG 컨소시엄(32개 기관) 두 곳만 참여했습니다. 배경은 명확합니다. 앤트로픽의 ‘미토스(Mythos)’ 모델이 20여 년간 발견되지 않은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고 공격 코드를 자동 생성하는 사례가 나오면서, AI가 보안의 주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입니다. 위협이 에이전트처럼 행동하는 순간, 방어도 에이전트처럼 작동해야 합니다. SKT 진영의 과제는 ‘전방위 사이버 보안특화 AI 파운데이션모델군 개발 및 에이전틱 보안서비스 실증’으로, 공격자 관점에서 취약점을 검증하는 AI 레드팀 전문기업까지 포함됐습니다. 네이버클라우드 진영은 금융보안원과 KAI, 한수원 같은 수요기관에 LG CNS와 LG AI연구원이 합류해, ‘국가 사이버 안보역량 내재화를 위한 AI 파운데이션모델 개발’을 내세웁니다. 지디넷코리아의 후속 보도에서는 ‘오픈소스 공격 탐지와 추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업계 시각도 나왔습니다. 선정된 컨소시엄에는 B200 GPU 256장이 10개월간 지원되고, 9월 초 발표평가로 승부가 가려집니다. 디지털투데이가 짚듯, 정부가 제한된 GPU를 직접 손으로 배분한다는 사실은 주권 컴퓨팅 논증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보안 모델도, 그 안에서 행동하는 에이전트도, 데이터 주권이 보장되는 인프라 위에서 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율도를 키우기 전에, 신분제부터

오늘의 뉴스가 인프라의 질문이 되는 지점입니다. 인터넷 트래픽의 다수가 이미 기계이고 기업은 실제 업무를 에이전트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에이전트 신분’을 다뤄야 할 곳은 프로젝트 층이 아니라 플랫폼 층입니다. 이 에이전트는 누구고 어디서 왔고 무엇이 허용되며 얼마나 자율적이며 실행 기록을 남기는가. 질문의 목록은 길지 않지만 답을 매번 손으로 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계도 함께 봐야 한다. 53 대 47은 2023년 글로벌 평균이고 워터마크나 홍채 인증은 ‘무엇이냐’의 질문을 풀지 ‘누의 것이냐’의 질문은 못 푸는 셈이다. 워터마크가 문서를 AI 생성으로 증명해도, 특정 API 호출이 특정 조직의 정책 아래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증명하지 못한다. 그 지점에는 에이전트 자체의 신분과 권한, 기록이 필요하다. 오늘 뉴스의 통증은 전부 이 목록으로 수렴한다. 미래에셋의 일임형 로보 Wrap에서 통증은 감사와 권한인 것이다. 특파모 2파전에서 통증은 실증 환경에서의 안전한 실행과 데이터 주권이다. SKT 진영이 제출한 ‘에이전틱 보안서비스 실증’ 과제를 관제 현장에 배치한다면, 탐지에서 추적과 대응까지 에이전트가 어디까지 진행했고 어디서 차단됐는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없이는 실증은 완성되지 못한다. 정부의 에이전틱 AI 이니셔티브에서 통증은 ‘안전’ 그 자체이다. 이걸 프로젝트마다 조각으로 붙인다면, 새 에이전트 하나 추가할 때마다 신분제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ThakiCloud가 이 질문에 내놓은 답은 Paxis이다. ThakiCloud의 Agent-Native Cloud이자 v1.1 GA를 마친 정식 제품이다. Paxis에서 스킬, 도구, 정책, 감사 로그는 사후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일급 리소스로 설계되어 있다. 각 에이전트의 자율도는 L0에서 L3까지 단계로 거버넌스되고 정책 게이트가 실행 전에 허용 여부를 가리며 실행된 모든 것은 감사 로그에 남는다. 격리된 샌드박스에서 안전하게 돌아가고 MCP 커넥터로 기업 시스템과 이어지며 스킬 마켓을 통해 검증된 스킬을 공급받고 CostRouter가 작업마다 맞는 모델을 골라 비용을 지킨다. 소버린과 온프레미스 배포도 Kubernetes 기반으로 지원한다. ‘누가 보냈나’라는 질문을 시스템 기능으로 번역해 둔 것이 Paxis인 셈이다.

처음의 상자로 되돌아간다. 언젠가 그 칸에 들어갈 문장은 바뀔 것이다.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저는 에이전트이고 이것이 저의 감사 로그입니다.’ 그 문장이 농담이 아니라 플랫폼이 준비해 두어야 할 형식이 되는 날, 인터넷 운영체제의 다수가 바뀌는 순간이 온다. 2023년의 53 대 47은 서사의 끝이 아니라, 첫 줄이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아래 뉴스를 종합해 작성했습니다.

태그: agent-identity, 에이전틱 AI, ai-governance, audit-log, bidirectional-authentication, 엔터프라이즈 AI, korean-ai-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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