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이 출하증서를 요구받는 부품이 된 날
글의 핵심 개념을 형상화했습니다.
세 줄짜리 스펙시트
한국투자공사, 줄여서 KIC의 모델 평가 기준표는 세 줄이었습니다. 정확도, 가성비, 다국어 적합성. 그 이상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개발사 국적이나 제재 명단 여부 같은 항목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칸이었습니다.
KIC는 주권 자산을 339조 원 운용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이 기관의 사내 AI 4개 모델 중, 언어모델은 알리바바의 Qwen3였고 검색 임베딩 모델은 미국 수출통제 명단에 오른 BAAI의 BGE-M3이었습니다. 더파워가 이 사실을 보도했고 보안 우려가 제기됐으며 강민국 의원은 공공기관 AI 보안 기준 마련을 촉구했습니다. 화살은 성능이 아니라 모델의 ‘출신’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장부들이 열렸습니다. 사내 AI 이용 건수는 5월 3755건에서 9월 798건으로, 4개월 새 78.7% 빠졌습니다. 같은 달 직원들이 외부 챗GPT를 쓴 건수는 3만6881건, 사내 AI의 약 46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서명된 계약은 GPU를 4개에서 12개로 늘리는 9억5000만 원대 증설이었습니다. 339조 원을 운용하는 펀드가, 이용률이 무너지는 사이 장비를 늘렸습니다.
798건은 성능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모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빠릅니다. 직원이 내부 AI를 피한 이유는 빠르지 않아서도, 정확하지 않아서도 아니었습니다. 써야 할 모델의 ‘이름표’에 무엇이 적혀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주권 자산을 다루는 기관에 수출통제 명단 모델이 들어 있으면, 성능과는 무관하게 사용자가 불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논란은 그 방향으로 터졌고 이용 장부는 그 답을 조용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장비는 그사이 계속 늘었습니다. 이용률이 78.7%로 무너지는 동안 9억 원대 증설이 서명됐다는 사실은, 이 조직이 ‘컴퓨트’라는 질문에 답하긴 했어도 ‘거버넌스’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성능과 가성비만으로 모델을 골랐던 1세대 사내 AI 도입이 거버넌스 공백을 드러낸 대표 사례가 바로 이것입니다. AI 도입의 진짜 병목은 GPU 대수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의 통제 아래, 누구의 승인에서 돌았는가’라는 질문에 조직이 답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이 논란이 길어지면 다음 질문도 따라옵니다. 이용률이 떨어지는데 장비만 증설되는 예산 집행에 대해, 공공 AI 예산의 성과 평가 기준은 함께 강화되는 사이클이 기대됩니다. 개발사 국적, 수출통제 명단, 데이터 흐름이라는 항목이 도입 전 필수 점검 항목으로 굳어질 전망이고 공공과 금융 기관의 AI 도입 심사 기준에 보안과 소버린 요소가 명문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공개된 오픈소스 모델조차 소스코드 검증과 사후 패치 관리가 가능한 통제된 실행 환경 위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도 함께 확산 중입니다. 즉 이 사건은 한 기관의 실수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업계의 조달 기준이 조용히 다시 쓰이고 있는 순간입니다.
KIC가 기다리지 못한 세계
세상은 이미 조달 문서를 다시 쓰고 있었습니다. 중국 상무부와 과학기술부는 10월 16일,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에이전트, 칩 설계를 아우르는 23개 AI 세부 기술을 수출 금지 및 제한 목록에 추가하는 개정 초안을 공개했습니다. 글로벌이코노믹이 보도한 정량 기준은 파라미터 2조 개 이상, 학습 연산량 10의 26제곱 FLOPs 도달 모델이었습니다. 해외 대상 공식 API나 클라우드 SaaS 형태의 상업 서비스는 예외지만 가중치를 해외 클라우드에 올리는 배포에는 사전 인허가 부담이 생깁니다. ‘원천 소스는 잠그고 상업 플랫폼은 열어둔’ 정밀 규제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초안의 배경은 7월, 국가 안보 사유로 강제 해지된 메타의 마누스 20억 달러 인수 건입니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는 ‘신청 즉시 승인’ 원칙이 관료 행정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불투명하다며 컴플라이언스 부담이 중국 AI 기업의 글로벌 클라우드 공급망 진입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키미와 GLM 같은 중국발 오픈웨이트 모델의 글로벌 클라우드 접근성이 줄면, 국내 기업의 저가 모델 활용 여건은 바뀌고 소버린 AI 수요는 미국과 한국 모델 쪽으로 재편될 수 있습니다.
미국 쪽도 움직입니다. 경향신문은 지금 상황을 양쪽이 동맹국 포함에서 최상위 모델 접근을 제한하는 ‘상호 무기화’ 구도라고 규정했습니다. PIIE 연구원은 중국 모델의 주 통로인 미국 클라우드마저 승인 대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고, 미 의회외교협회 인사도 미국이 반대 프레임워크를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정우 국가AI전략위원회 부위원장은 오픈웨이트라도 신규 모델은 공개 자체가 허가 대상이 될 수 있어, 프런티어 모델 기반 디스틸레이션 학습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국의 위치는 어렵습니다. 국산 최고 모델은 아티피셜 애널리시스에서 47점, 미국 최상위 모델의 61~63점과는 뚜렷한 격차입니다. 내년 4조7000억 원 프런티어 AI 예산 중 3조9000억 원이 엔비디아 GPU 구매에 배정돼 ‘풀스택 자립과는 거리’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내년 1분기에 독파모 최종 2개팀 선정과 프런티어 AI 출자 대상 선정이 맞물리면서 소버린 AI 전략의 첫 시험대가 도래한다는 평가입니다. 조선일보 단독 보도는 정부 예산 5조 원 규모의 한국형 소버린 AI 프로젝트에서, 정작 공무원과 공공기관에 도입된 모델의 과반이 외산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테크판의 신호도 이쪽을 가리킵니다. AI 거품론이 테크판을 덮치는 사이 오픈웨이트 모델은 오히려 힘을 얻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디지털투데이에 따르면 메타는 8160억 매개변수 모델 뮤즈 스파크 오픈을 공개해 애플과 로컬 AI 동맹을 맺었고, 엔비디아는 에이전트용 오픈 모델 네모트론 3.5를 내놓았습니다. 추론 비용 최적화를 위해 중국산 오픈웨이트 모델 멀티벤더 전략을 구사하던 기업들은 이제 공급과 통제 리스크를 재평가합니다. 저가 모델에 편승하던 국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활용 여건도 바뀌는 지점입니다. 최강 모델의 여권이 하룻밤 사이 바뀔 수 있는 시대에, ‘가져온 것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보안부서를 떠나 조달 테이블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모델 문을 나가지 않게 한 팹
한편 같은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답한 조직도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프랑스 미스트랄 AI가 반도체 데이터 특화 모델을 공동 개발하고, 운영은 외부 클라우드가 아니라 사내 인프라에서 합니다. 소셜밸류가 보도한 핵심은 공정 데이터 보안이 최우선이라는 점입니다. 삼성은 2030년까지 엔비디아 GPU 5만 개 이상을 도입해 AI 자율 공장 전환을 추진하고 디지털 트윈과 OPC 시뮬레이션 성능은 20배로 향상됩니다. DSEP 플랫폼에는 이미 장비사 중심 60여 곳이 참여해, 공정 데이터 공유와 AI 기반 설비 관리 생태계가 가시화됐습니다. 장비 협력사들도 하드웨어 성능을 넘어 예지보전 등 AI 소프트웨어 역량을 새로운 경쟁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자율형 팹 3대 축에 54조 원을 투자하며, 설비 유지보수와 결함 분석 시간 50% 이상 단축을 목표로 합니다. 워크플로의 구조는 ‘사람은 판단하고 AI는 예측하는’입니다. AI가 원인과 대책을 제시하면 엔지니어가 검증하고 최종 결정합니다. 정부는 스마트공장 보급 예산을 4021억 원으로 70% 증액해, 자율형 공장 30곳과 제조 AI 특화 스마트공장 400곳을 지원합니다. ‘사람은 판단하고 AI는 예측하는’ 공장이 K 제조업의 새 표준이 될지가 주목받는 가운데, 피지컬 AI는 반도체를 넘어 배터리와 조선 등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될 전망입니다.
같은 전장에서 AWS는 클라우드 운영 에이전트를 제품화했습니다. InfoQ 보도에 따르면, 기존 수동 평가 도구였던 Well-Architected Tool을 에이전트 기반 서비스로 승격한 것입니다. Well-Architected Agent 프리뷰는 리소스 구성과 활용 지표, 애플리케이션 토폴로지를 자동 상관관계 분석해, 아키텍트 판단 수준에 가까운 권고를 대량 생성합니다. 65개 이상 AWS 서비스에 걸쳐 비용, 보안, 탄력성, 성능을 분석해 우선순위 권고를 만들고 권고마다 CLI와 IaC 변경 패키지를 제공합니다. 다만 미국 3개 리전 지원에 Business Support+ 이상 고객 전용이라는 접근 제약이 있습니다. Strands Box는 OS 격리와 Dogwood라는 정책 언어를 더해, 네트워크 출력과 Shell, Python, MCP 브로커 같은 여러 강제점에 세밀한 행동 정책을 적용하는 에이전트 샌드박스로 오픈소스 공개됐습니다. ‘10분당 슬랙 게시 3회 제한’이나 ‘고객 데이터 디렉터리 접근 후 외부 HTTP 차단’ 같은 정책은 이제 개발자의 숙제가 아니라 표준 부품입니다. 5천 개에 달하는 AWS 파트너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라는 실무 질문도 쏟아집니다. 금융과 공공처럼 폐쇄망에서 클라우드를 운영해야 하는 조직에는, AWS 의존형 에이전트의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샌드박스가 인프라가 되는 날, 조달자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모델은 무엇인가’에서 ‘이 모델은 어떤 정책 아래 실행되고, 그 행동 기록은 어디에 가느냐’로 바뀝니다.
스펙시트에 추가할 네 칸
그렇다면 세 줄짜리 모델 조달 문서에는 어떤 칸을 추가해야 할 것인가. 세 줄 기준표가 ‘모델은 구독 서비스’라는 인식의 조달 문서였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모델은 부품’이라는 인식의 문서입니다.
첫째는 출처입니다. 개발사 국적, 제재 명단 상태, 모델이 조직에 들어오는 경로. 둘째는 실행 장소입니다. 모델이 어디서 도는지, 데이터가 울타리 안에 머무는지. 셋째는 행동 이력입니다. 누가 승인했고 무엇이 일어났으며 그 질문에 사후에도 답할 수 있는지. 넷째는 작업 배정입니다. 어떤 모델이 어떤 업무를, 어느 비용으로 담당하는지.
이 네 질문은 곧 ThakiCloud의 Agent-Native Cloud Paxis가 일급 리소스로 다루는 대상과 정확히 겹칩니다. 정식 제품 v1.1 GA 이후, Paxis에서 Skills, Tools, Policies, Audit Logs는 부속 옵션이 아니라 실행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에이전트가 부를 수 있는 모델은 정책이고 모든 행동은 감사 로그를 남기며 실행은 격리된 샌드박스 안에서 일어납니다. 자율도는 L0에서 L3까지의 거버넌스 척도로 관리되고 작업별 모델 선택인 CostRouter도 내장 기능이며 소버린과 온프레미스 Kubernetes 배포인 ai-platform, MCP 커넥터와 스킬 마켓까지 함께 제공됩니다.
KIC의 장부, 798건과 46배는 모델 조달 거버넌스 논란의 첫 표본으로 산업에 남을 것입니다. ‘가성비’ 하나로 모델을 고르던 시대는 끝난 셈입니다. 다음 KIC식 감사는 모델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델 위에서 어떤 에이전트가, 어떤 도구에 접근하며 실행하는지가 점검 대상이 됩니다. 스펙시트가 다시 작성되는 중입니다. 그리고 새로 생기는 칸의 이름은, 모델의 출하증서와 그 위에 세워지는 실행 거버넌스입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아래 뉴스를 종합해 작성했습니다.